어느순간 느끼게 되었다.
뭐랄까... 나역시 한국화된 러스트밸트의 사람임을.
빈곤과 중간의 그 어정쩡한 중간어딘가에 나는 끼여있었다.
미드타운같은 겉으로보이기엔 중산층의 도시는
IMF와 불황속에 하나의 쇠락한 한국판 러스트 밸트에 불과했다.
미국과는 반대로 더욱더 저임금 저임금을 추구했고,
그 많은 자리들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웠을 뿐이다.
그 대가는 치안의 불안이고, 따로이 경찰서가 설립되게 되었다.
인두세로써, 법인세로 세수는 만만치 않게 들어오는 지역이었기 떄문이다.
고교때 그곳을 탈출한사람도 대학부터 탈출한 사람도 혹은
대학의 졸업과 함께 떠나간 사람도 많은 그 자리에서 나는 고민했었다.
아직도 대졸을하고도 그곳에 남아있는 그들에게 나는 먹물이다.
그들이 보는 시선에서는 좋은 대학 전공으로 졸업을 했고,
나쁘지 않은 직장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해외도 곧줄나간...
'여권있는' 그런 반쯤 다른 세상의 사람인거마냥 묘사될떄도 있다.
그렇다해도 비수도권에서 비수도권대학을 졸업했고,
남들보다 더 불안한 얼어붙은 강위를 걷는 듯한 삶위에 있고,
유망하다고 여겨지는 또다른 새 노동계층이 되려는 교육과정.
그안에 있을 뿐이다.
단지 좁은 시야에서 그 지역사회안에서 공무원을 해야하고,
안전수칙 제대로 지켜지지않는, 또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스마트팩토리
(그들에게는 추가적인 공장 자동화)라는 미래의 리스크를 싫어할 뿐이다.
모든 것이 '생존'이라는 것위에 있는 문제다.
한번은 여기 박사 아저씨에게 그런 말을 한적 있다.
저임금의 악순환의 과정이다.
지역 사회에 돈이 마르니, 사람들이 아예 더 싼것이나 비싼것을 찾게되고, 그 싼것들을 찾는 과정에서 경쟁하는 사업체들은 한계점 근처까지 가격을 형성해서 얼핏보면 소비자효용의 최대화가 되는 것 같이도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업체들에 일하는 사람들이 저임금화되고, 그것이 일부는 외노자로 교체. 또 그런 사업체들이 많아져서, 지역사회전체적으로 임금의 하향 평준화, 근로시간의 장기화 과정을 이루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삶은 피폐화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상처가 그들의 아이들에게 들러붙는 심리적 상처의 '전이'에 이른다. 부모는 그들을 돌볼 시간이 없거나 적다. 중산층에 가까운 아이들은 학원들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거짓말, 폭력, 비행, 성매매, PC방(집에 컴퓨터가 없거나, 하나이거나, 그 하나가 매우 낡았다는 이유로)로 전전하는 것도, 고등학교 보충수업을 파트타임으로 뛰면서 봐왔다. 또 그것들이 그들만의 생존방식임도.
그것이 우리삶의 모순이고, 민낯이다. 지금 나나 많은 주변 지인들은 아이를 낳기를 꺼려하기 시작했다. 삶의 역동성....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또 불안정성이라고하기엔 너무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전세계적으로 산업이 변해가고 삶의 형태들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너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아직은 세계경제의 호황이란게... 피부에 와닿지 않은 쌀쌀한 겨우날 강남 아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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